지난 3월 16일(목)에 거행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추…
1921년 5월 12일 도산선생이 임시정부 …
부산흥사단과 부산진구청이 손잡고 "부산진시민대학"을 열…
도산의 독립 운동 방안은 흔히 ‘준비론’으로도 불리는 독립전쟁 준비론이었다. 그는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7년 5월 12일 수많은 청년 학생들을 앞에 두고, 그의 명연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른바 삼선평연설(三仙坪演說)을 행하였다. 본래 약소국이었던 일본이 38년 간의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러시아를 이긴 예를 들면서, 그는 우리의 국권을 침해하는 일본과 언젠가는 치뤄야 될 전쟁에 대비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도록 다 함께 힘을 모아 준비에 나서자고 역설했다.
그가 한말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 결성을 제안하면서, 처음으로 주장하기 시작한 독립전쟁 준비론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국내에서 오래 떠나 있던 그가 신민회의 결성에 비교적 쉽게 성공한 것을 보면, 그의 독립 전쟁 준비론이 당시의 애국지사들에게 매우 큰 설득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즉 그가 귀국하기 전의 국권회복운동이 이미 그 한계를 뚜렷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로부터 시작된 한말 국권회복운동은 주로 유생(儒生)들이 주도한 의병운동과 신지식인 지사(志士)들에 의한 계몽운동의 두 갈래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선 국권회복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는 있었지만, 그 방법론과 지향이 달라 서로를 비판하며 반목하고 있었다. 또 각각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도 큰 약점들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