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담병원 지정만 해놓고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한 명을 치료하면 경찰서, 법원 등에 불려다니느라 정작 외래환자 볼 시간이 없는데, 누가 나서서 피해자 치료를 하겠습니까.” 정부가 성폭력 전담의료기관을 지정만 해놓은 채 관리·감독에 소홀해 일선 의사들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 전담의료기관’제는 피해 여성을 돕기 위해 1996년 도입된 제도. 그러나 한 달 이용자 수가 1명 내외인 병원이 수두룩할 정도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전담의료기관 실태=여성가족부 등에 따르면 전담의료기관으로 지정된 병원은 지난해 6월 말 현재 전국 329곳에 달한다. 민간의료기관이 243곳, 국공립병원 45곳, 보건소(보건의료원 포함) 41곳으로 민간병원이 대다수다.
이들 병원은 피해자의 보건 상담 및 지도, 치료를 맡는다. 산부인과, 정신과, 응급의료센터가 공동으로 피해자의 임신 여부 검사, 정신질환 치료 등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 제도로 혜택받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9월 광진구청이 지정한 건국대병원은 1월 현재까지 단 3명의 피해자만 이용했다. 순천향병원을 찾은 성폭력 피해자 수도 지난 1년 동안 24명에 그쳤다.
몇몇 지방 의료기관은 한 해 실적이 한 건도 없는 곳도 있다.
응급센터가 없는 전담의료기관도 많다. 피해여성을 데리고 전담병원을 찾았던 한 경찰은 “응급센터도, 응급키트도 없어 다른 병원으로 이동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허술한 제도와 대책=전담의료기관이 유명무실한 이유는 치료 책임을 해당 병원이 전적으로 져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진료를 받으면 진단서나 관련 서류 전부를 의사가 직접 경찰에 제출해야 하는 것은 물론 법원에 출두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곧 돈’인 민간 병원은 치료를 꺼리게 마련이다. 성폭력 여성 진료에 한때 적극적이었던 병원들도 전담의료기관 지정을 반납하는 실정이다.
상계백병원 산부인과 이철민 교수는 “피해자 한 사람을 진료하는 시간이면 외래 20∼30명을 볼 수 있다”며 “민간 병원 의사들이 좋은 취지로 성폭력 피해자를 도우려 해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 치료가 이원화돼 있는 점도 문제다. 여성가족부는 전담의료기관제와 비슷한 개념의 ‘원스톱(One-Stop)’ 서비스센터를 전국 14곳에 운영 중이다.
성폭력 피해 여성 치료에 책정된 예산(2006년 5억2000만여원)은 329곳 병원과 14개 ‘원스톱’ 센터를 관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환급제도 문제다. 피해 여성이 먼저 병원에 진료비를 낸 후 다시 여성단체나 시·군·구청을 통해 환급받아야 한다. 성폭력이라는 잊지 못할 상처를 받은 피해자가 진료비를 돌려받기 위해 서류를 들고 뛰어다녀야 하는 실정이다.
전담의료기관제 활성화를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산 상담원은 “병원에 대한 인센티브, 의사 교육, 제도 마련 등 삼박자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 이정심 인권보호팀장은 “올해부터 응급의료시스템이 가동되는 병원만 전담기관으로 지정하고 병원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의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안용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