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월례강좌-도산업적을 통한 도산사상 이해하기(본부 이은숙 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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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명 : 동맹수련과 참여학습
강사 : 이은숙단우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과 업적
이은숙(흥사단교육수련원 부원장)
1. 들어가기
소년 안창호가 고향 평양에서 청일전쟁(1894)을 겪고 ‘나라에 힘이 없다’ ‘나부터 힘을 기르자’라는 결심을 하여 피난길에 서울로 상경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한문 서당을 통해 유교의 기초 학습을 두루 마친 안창호가 단신으로 서울에 와서 언더우드와 밀러 목사를 만나 경신학교의 전신인 구세학당을 다니게 된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안창호는 구세학당 시절, 송순명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신학문을 접했고 기독교에 입문했다. 또한 언더우드를 통해 배재학당에 다니던 황해도 장연출신이며 세브란스 의과대학 1회 졸업생인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김필순을 통해서 배재학당 토론그룹인 협성회 준회원에 입회하였고, 서재필을 뒤따르며 독립협회 활동을 했다. 이 무렵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서재필의 『독립신문』그리고 기독교사상은 안창호의 근대사상 형성에 골간을 이루게 된다.
안창호는 독립협회 활동에서 약관 20세 나이로 쾌재정 연설과 두 차례에 걸친 만민공동회 연설로 청년 명사 반열에 들게 된다. 그의 연설은 논리 정연할 뿐만 아니라 설득력과 감화력이 있어 당시 많은 애국청년들이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는데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1907년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로 재규합되었고, 3.1운동이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다시 규합된다. 이들은 도산 서거(1938) 이후에도 도산의 염원에 따라 흥사단을 지키고 좌우로 분열된 독립운동 노선의 통합을 이루며 임시정부를 지켰다.
2. 우리나라 최초 자유민권공화국 사상정립
우리나라는 19세기 후반에 개화당의 정강 14조를 통해서 처음으로 “인민평등권”이 명시된 바 있다. 이 개화운동은 근대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공화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1884년 정변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10년 후, 동학과 농민혁명을 통해서 아래로부터 근대적 자유민권의 자각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학자들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전주화약이후 동학당집강소를 설치하고 민자치적인 치안행정을 실시했던 점을 평가하여 이를 근대적 자유시민사상 형성의 단초로 보고 있다. 여기에 1896년 독립협회운동은 중화권에 대한 事大로부터의 독립과 황제권의 제한을 뜻하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점에서 자유민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을 제공했다. 특히 배재학당 중심의 협성회 토론회가 거리로 나와 관민이 모인 만민공동회 형태로 확장되고, 이것이 의회지향 운동으로 발전된 것은 자유민권운동의 예비단계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개화운동은 1906년 대한자강회와 1907년 신민회운동을 통해 보다 뚜렷해진 공화제 지향으로 발전했다.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 자강회 회원들은 국제적 열국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강의 기본 단위로 국가형성론을 주장했다. 이 근대적 국가에 필요한 것이 신분제를 극복한 국민의 형성이었고, 국민 형성은 애국심으로 뭉친 단체결합을 의미했다. 즉 개인의 자유 민권 보다는 국권 우선 주의였다. 이러한 개화 자강의 논리에 민권 우선을 들고 나온 지도자가 도산 안창호였다.
도산은 독립협회 시절에 유길준(1856~1914)의 『서유견문』을 탐독하고 서구의 문명개화론에 심취했다. 도산은 이 책을 통하여 역사, 진보, 국가, 인민, 권리, 등 근대이념에 감화되었다.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강제 해산된 이후, 도산은 유길준의 발자취를 따라 1902년에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결행했다. 도산의 나이 24세였다. 도산은 미국 생활을 통해 유길준이 소개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문명개화의 근대주의, 역사주의, 국가주의를 체험했다. 역사주의란 진보하는 하나의 총체를 의미했고, 새로운 중심, 새로운 주체의 형성으로 국가가 형성되며, 인민은 국가라는 정치제제를 구성하는 한 요인임을 인식했다. 도산은 사람은 누구나 자유와 평등의 천부인권을 갖는 존재이며 동시에 국가의 자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 존재로 인민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들이 사회와 역사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주체라고 확신했다.
도산은 또한 유길준의 해설 그대로 근대문명은 국제관계에서도 새로운 중심화, 탈 중심화로 새로운 정치이념이 생성되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탈 중심화 된 국제관계 속에서 근대적 주권이 핵심을 이루고, 주권과 인권을 定礎한 국가 이성(민주주의)에 대한 확신도 갖게 되었다. 특히 미국을 통해 인민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 민주 공화국의 힘을 믿게 되었다. 진보와 국가를 두 축으로 하고 있는 문명개화는 새로운 중심,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며 국제관계의 정치학으로 보편성에 입각한 만국공법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를테면 ‘공법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법은 국민을 만들었다’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도산이 ‘전 인류의 완전한 행복’을 꿈꾸게 된 사상적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도산은 동포사회운동에 뛰어들어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확신했다. 이들에게 문명사회의 보편적 규범과 근면, 성실 등 개인의 윤리를 강조했다. 도산은 동포들의 노동기반을 핵심에 두고 자유시민의 기초 훈련을 강조하면서 노동윤리와 조직의 경영윤리를 확립해 나갔다. 도산이 만든 노동주선소나, 친목회(1903), 공립협회(1905) 등은 모두 이러한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도산은 이 시기에 중국 양계초(1873~1929)의 『음빙실문집』과『음빙실자유서』을 접하고 ‘단체결합’에 의한 국가형성론에도 주목했다. 양계초는 군주제를 살아 온 중국인들에게 국가유기체설로 국가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진화론 원리를 중국 근대화론에 적용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질타하면서 신민설을 주장했다. 이 ‘신민’은 자유민권의 자유시민은 아니고 입헌군주제의 신민이거나 민족주의적 민족주권을 앞세운 ‘새 국민’의 개념이다. (신일철, 『시장의 철학』2001. 99) 양계초의 사상은 국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국가형성에 있어 신채호, 박은식 등은 국가를 ‘민족정신으로 구성된 유기체’로 정의했다. 특히 신채호는 ‘민족’을 혈연적 동질성과 역사적 연속성을 갖는 국가의 정체성으로 규정했다. 그는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을사늑약(1905.11.17)이후 도산은 대한을 황제가 아닌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로 국권회복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우리나라가 문명개화(근대화)하여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려면 국민도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따라서 인민이 먼저 자유와 민권을 자각하고 강한 단결력을 키워야 한다는 사상체계를 정립했다. 이것이 국민훈련(근대적 시민양성) 기초 위에 모범공화국을 세울 수 있다는 도산의 민주국가건설을 위한 운동론이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 12월 말, 공립협회 이강, 임준기 등과 밤샘 토론을 통해 미국에서 경험한 자유시민의 민권사상을 국내에 적용할 것을 확인하고 훈련조직으로 청년학우회를 구상했다. 그리고 대한신민회취지서와 통용장정을 완성했다. 그 핵심 내용은 “오직 신정신을 환성(喚醒)하야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라고 하여 양계초의 신민설을 국권회복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신일철, 『시장의 철학』2001. 99) 1907년 동경에서 유길준과 회담을 갖고 귀국한 도산은 당시 양계초에 동조하여 국가유기체론을 따르던 개화 자강의 인사들과 비교적 수월하게 결합하여 비밀결사체 신민회를 결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권회복운동이 성과를 이루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보편적 국가이성을 상실하고 만국공법을 무시한 채 새로운 중심이론으로 정한론을 내세우고 침략해 들어오는 일본의 무력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신민회운동 과정에서 도산은 안태국, 차리석, 이갑 등과 신민회운동을 주도하면서 방방곡곡을 돌며 애국계몽연설로 애국청년들을 감동시켰다. 연설 내용은 주로 자유와 평등주의에 입각한 민주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과 침략해 들어오고 있는 일본을 넘어설 수 있는 독립전쟁준비론 이었다. 도산은 1907년 5월 삼선평 연설에서 청년들에게 독립전쟁준비를 강조하면서 “국가는 1인의 소유가 아니요, 나(吾人)의 어깨에 大韓 두 글자를 각기 짊어 졌으니 지금까지의 낡은 생각을 더 이상 갖지 말아야”한다면서 주인정신과 책임감을 일깨웠다.(『안도산전서』흥사단 발행, 584)
도산은 민족 자강의 방법으로 교육입국과 산업진흥을 제시했다. 여기에 자유시민의 기초훈련의 대상으로 우선 청년을 생각했다. 신민회 산하에 설치한 청년학우회는 대성학교와 또 다른 차원에서 인물양성기관이었다.
청년학우회를 통해서 훈련시키고자 했던 덕목들은 근대적 시민윤리의 핵심가치로 무실, 역행, 자강, 충실, 근면, 정제, 용감 등이었다. 훈련 방법으로는 덕육, 체육, 지육을 제시했다. 덕육에서는 강연, 품행의 감독과 지도, 근검저축의 장려, 청년학생의 가능한 공공사업의 실행, 자강, 충실, 근면, 용감 정신의 고취를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체육에서는 위생상 조심할 사항을 훈시하고, 수영장이나 주행장이 갖추어진 운동장을 설비하며, 야구 경기 등을 순회하며 치를 수 있는 스포츠 육성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육에서는 기관 잡지를 간행하여 구독케 하고, 유익한 서적을 출판하며, 도서 종람소를 설립하여 독서를 권장하고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며, 간이 박물관을 설립하는 계획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산은 청년학우회를 통해서 “뜻 있는 청년들이 하나의 큰 정신단체를 조직하여 마음과 힘을 일치하며 지식을 나누고 실천하고 전진을 모색하고 고락을 함께 하여 풍속의 퇴폐를 막고 앞날의 행복을 찾아 개혁적인 새로운 청년으로 하여금 사회를 개혁하여 새로운 터전을 구축하게 할 것”(청년학우회 취지서) 이었다.
3.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기초 수립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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