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 김정한 연보
1908년(1세) 음력9월 26일, 경남 동래군 북면 남산리(南山里)에서 김기수(金基壽)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雅號는 樂山. 1913년(6세) 향리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함. 1919년(12세) 사립 명정(明正)학교 입학, 3․1운동 일어남. 1923년(16세) 중앙고보(中央高普) 입학. 1924년(17세) 9월 동래(東萊)고보로 전학. 1927년(20세) 3월, 경남 양산군 하서면 화제리 풍양인 조희원씨의 장녀 조분금 (趙分今) 과 결혼. 1928년(21세) 동래고보 졸업, 9월 양산 대현(大峴) 공립 보통학교 교원 취임. <<동아 일보>>에 시를 투고함, 11월 일본의 민족적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조선 인교원연맹 조직을 계획하였으나 일경으로부터 가택 수색을 받고 피검, 울산서에서 동래서로 이관되어 심문을 받음. 1929년(22세) 2월, 도일(渡日), 동경제일외국어학원에 1년간 수학, 일본문학과 서양문 학을 탐독함. 1930년(23세) 동경 조도전대학 부속 제일 고등학원 문과 입학 1931년(24세) 조선인 유학생회에서 발간하던 ‘학지광’ 편집에 참가. ‘조선시단’, ‘신계 단’ 등에 시와 단편소설 발표. 이때 발표된 단편소설 ‘구제사업’은 작품제목 만 실리고 내용은 전문 삭제당함. 4월, 장년 복선 출생. 1932년(25세) 일본서 귀향. 양산 농민봉기사건에 관련되어 피검. 9월에 학업을 중단함. 단편소설 ‘그물’을 문학건설에 발표함. 1933년(26세) 10월,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원 취임. 이때부터 농민문학에 뜻을 둠. 1935년(28세) 2월, 차녀 복윤 출생. 1936년(29세) 1월, 단편소설 ‘사하촌’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 ‘옥심이’를 조선일 보에 연재 발표함. 1937년(30세) 7월, 중일전쟁 일어남. ‘항진기’를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함. 7월, 장남 남재 출생. 1939년(32세) 남해군 남명 공립보통학교로 전임감. 8월, 삼녀 출생 1940년(33세) ‘낙일홍’. ‘추산당과 곁사람들’, ‘월광한’ 등을 발표함. 3월, 교원직을 사직 하고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동래로 이사함. 지국일에 전념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됨. 8월, 동아일보 폐간됨. 이 시기부터 붓을 꺽 고, 경남 도청 상공과 산하 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하여 해방될 때까지 근무함. 1941년(34세) 11월, 차남 충 출생. 1944년(37세) 사녀 복연 출생. 1945년(38세) 8월 12일 불령선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위해가 있다는 소식을 전 해 듣고 일시 구포 지인댁으로 피신함. 8․15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 회 경남지 부 문화부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신고송과 함께 ‘희망자’라는 연 극단을 만들어 공연하는 한편 부산 동래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함. 민주신 보 논설위원을 지냄. 11월, 막내딸 출생. 1946년(39세) 문학가동맹 및 부산예련위원회 회장 및 문화단체총연합회 경남지부 부지 부장을 맡았으나 사상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중앙으로부터 비판받았다고 함. 1947년(40세) 부산중학교 교사로 취임함. 1949년(42세) 부산대학교에 출강함. 경남 중등교사 자격심사위원으로 위촉됨. 1950년(43세) 부산대학교 조교수로 발령받음. 6․25발생, 가족들 분산됨. 1951년(44세) 청탁에 의하여 이시영 옹의 약전 ‘성제소전’을 집필함. 1954년(47세) 교육공무원법 개정에 의하여 부산대학교 강사로 전락됨. 1955년(48세) 3월, 교수자격심사위원회로부터 조교수 자격을 인정받음. 7월, 부교수로 승진함. 1956년(49세) 창작집 ‘낙일홍’ 출간함. 1958년(51세) 경상남도 도지 편찬위원에 위촉됨 1959년(52세) 제3회 부산시문화상(문학상) 수상함. 부산일보 논설 집필. 칼럼, 수필등 다수 발표함. 경상남도 지명 제정위원에 위촉됨 1960년(53세) 4․19혁명 일어남. 5월부터 부산대학교 문리대 문학부장으로서 학장 일을 맡아 봄. 1961년(54세) 5․16으로 6월 학교에서 물러 남. 부산일보 상임논설위원이 됨. 1963년(56세) 9월부터 부산대학교에 출강함. 1965년(58세) 부산대학교 전임강사로 복직함. 11월 조교수로 승진함. 1966년(59세) 10월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공식 복귀. ‘한국 문학 센티멘탈리 ’ ‘고시조에 반영된 농민’을 인생론전집(박영사)과 부산대학교 문학 대학보에 각각 발표함. 1967년(60세) 한국문인협회 및 예총 부산지부장으로 취임함. 이후 71년까지 왕성하게 작품 발표함. 1969년(62세) 부산대학교 부교수로 환원됨. 중편 ‘수라도’로 제6회 한국 문학상 수상함. 1971년(64세) 제2창작집 ‘인간단지’(한얼문고) 간행됨. 11월, 제3회 문화 예술상 수상함 1972년(65세) 전국 지방국립대학교 교수협의회연합회 회장에 피선됨. 1973년(66세) 문고판 ‘수라도, 인간단지’ (삼성출판사) 간행됨. 1974년(67세) 부산대학교를 정년퇴직함. ‘김정한소설선집’(창작과 비평사) 간행됨. 만해문학상 심사위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고문,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 지냄. 1975년(68세) 문고판 ‘수라도’(삼중단) 간행됨. 1976년(69세) 한국 엠네스트(국제사면위원회)위원, 문고판선집 ‘모래톱 이야기’(범우 사) 간행. ‘김정한소설 선집’ 재판이 ‘제3병동’으로 개제되어 나옴. 10월 문화훈장 (은관)을 수상함. 1977년(70세) 한국 엠네스트 고문. 문고판 ‘사밧재’와 ‘인간단지’(동서출판사) 간행됨. 장편소설 ‘삼별초’(민족문화대계9, 동화출판공사)를 발표함. 1978년(71세) 수필집 ‘낙동강의 파숫군’(한길사) 간행됨. 1983년(76세) ‘제3병동’ 5판이 ‘김정한소설전집’으로 개제, 증보되어 간행됨. 1985년(78세) 5․7문학협의회 고문 맡음. 1987년(80세)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회장 맡음. 1992년(85세) 폐기종으로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 낙상하여 대퇴부 골절로 석달 반 동안 입원, 입원 중 카톨릭 영세(영세명 요셉) 1994년(87세) 심산상 수상. 1996년(89세) 11월28일 오후3시30분 타계, 부산 남천성당에서 사회장, 신불산 공원묘지에 영면함.
작품연보 1932년 구제사업 그물 1936년 사하촌 옥심이 1937년 항진기 1938년 기로 당대풍 1939년 그러한 남편 1940년 월광한 낙일홍 추산당과 곁사람들 1941년 묵은 자장가 1946년 옥중회갑 1947년 설날 1949년 하느님 1950년 오뉘 1951년 병원에서는 도구 1953년 처시하 1954년 누가 너를 애국자라더냐 농촌 세시기 1955년 남편 저당 1956년 액년 개와 소년 낙일홍 1966년 모래톱 이야기 1967년 과정 입대 1968년 유채 곰 축생도 1969년 제3병동 수라도 굴살이 뒷기미 나루 1970년 지옥변 독메 인간단지 실조 어둠 속에서 1971년 산거족 사밧재 상황경미 산서동 뒷이야기 인간단지 1973년 회나뭇골 사람들 수라도, 인간단지 1974년 김정한소설선집 이후 76년 3월에 제3병동으로, 다시 83년에 김정한소설선집으로 증보, 개정 출판 1975년 어떤유서 수라도 위치 1976년 교수와 모래무지 모래톱 이야기 1977년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 삼별초 사밧재 인간단지 1978년 낙동강의 파숫군 1983년 거적대기 1985년 사람답게 살아가라 1985년 슬픈 해후 1989년 황량한 들판에서 1993년 낙동강1,2 1994년 수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