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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생애와 업적

작성자 차동박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4-02 11:32 조회2,8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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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난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열여섯 살 때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접하고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통해 그는 그때까지의 평범한 생활을 깊이 반성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소년시절 오르내렸던 대동강변 모란봉] [청일전쟁으로 파괴된 평양근교 민가]

독립협회와 공립협회 활동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고,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도산이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결집하여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주의 교민사회에서 공립협회를 만든 다음부터였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여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되어 도산이 귀국하기까지 직접 이끌었던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다. 또 3층 건물의 회관으로 가졌으며,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해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통틀어 매우 힘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자라났다.

[도산의 강연을 듣기위해 모여든 청중] [공립협회 창립 임원(아래 외쪽에서 세번째)]

신민회 활동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산은 동지들과 진지한 상의 끝에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귀국하기로 결심하였으며, 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이미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과 조직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즉, 민주공화국가건설(民主共和國家建設)이라는 민족운동의 목표와 독립전쟁준비론(獨立戰爭準備論)이라는 국권회복의 방법론과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안이 그것이었다.
귀국 즉시 도산은 양기탁(梁起鐸)ㆍ전덕기(全德基)ㆍ이동휘(李東輝)ㆍ이갑(李甲) 등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는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한말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지휘했던 신민회(新民會)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도산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교육ㆍ언론ㆍ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약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활동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시절의 도산]

1910년 5월 통합 교민단체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었다.
이는 공립협회를 비롯한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각 한인단체가 합쳐진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북미 지방총회와 하와이 지방총회만 있었으나, 계속하여 시베리아 지방총회와 만주 지방총회도 설립되었다. 1912년 11월에는 도산의 주관으로 4개 지방총회 대표자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도산을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해외의 전교민이 도산을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 속에 결집한 셈이었다.
국내가 일제의 지배 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선 해외 한인의 총단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겼다.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이라는 과제를 일단 해결한 도산은 다음 해인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국내에서 그가 세웠던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훈련단체였다. 흥사단은 미국에 본부를 두었는데, 3ㆍ1운동 후에는 중국과 국내에도 회원을 확보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 활동

1918년은 약소 민족들에게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던 해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담이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교민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는데, 이에 도산은 아직 그 시기가 아님을 말하고 좀 더 실력배양에 노력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3ㆍ1운동 소식을 접하자 도산은 일제의 총칼을 무릅쓰고 맨손으로 총궐기한 국내 동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도산은 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1919년 5월말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그곳에도 이미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도산은 내무총장에 선임되어 있었다. 도산은 당초 정부 형식이 아닌 정당 형식의 독립당 결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은 기정 사실로 되어 있었고, 청년들은 그의 취임을 강력히 재촉하였다.
도산은 첫 각료로 취임해 국무총리 대리를 겸하면서, 아직 명의상의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실체를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불러 모았으며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
일단 수립된 임정을 권위 있는 전 민족의 최고 지도기관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상해 임정 외에도 이미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서울에서도 한성정부의 구성이 발표되어 있는 실정이어서 그 통합이 시급하였다. 도산은 3개월에 걸친 헌신적인 노력 끝에 결국 9월에 들어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후 통합 임정의 국무총리인 이동휘를 비롯하여 각부 총장들이 차례로 취임하고 대통령 이승만까지 합류함으로써, 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임정의 중심인물이 되어야 할 이승만과 이동휘 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다. 도산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동휘가 임정을 떠났으며, 이승만도 미국으로 가버렸다. 도산은 임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전체 독립 운동가가 한번 크게 모여 다시 의견을 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임정을 사퇴하고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923년 초부터 국민대표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 새정부창조론ㆍ임정개조론ㆍ현상고수론 등으로 갈려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기념]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창간호]

대독립당 운동과 한국독립당 활동 그리고 순국

[한국독립당 추진때의 도산]

1926년 5월 말 다시 상해로 간 도산은 이제 좌우 합작의 대독립당운동(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섰다. 좌우합작론은 1924년경부터 국내외에 걸쳐 제기되었는데,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산발적으로 논의되는 데 그치고 있던 좌우합작문제를 중국과 만주에서 본격적인 실천운동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도산이었다. 상해 도착 후 한 달 여가 지난 7월 8일 140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도산이행한 ‘임시정부 문제와 우리의 혁명운동에 대하여’라는 연설은 그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도산의 주도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발히 추진되다가 실패로 끝나, 1920년대 말 중국에서의 한국독립 운동계는 결국 민족주의자들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사회주의자들의 한국 독립운동자동맹(韓國獨立運動者同盟)으로 나뉘어지고 말았다. 한국독립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우리 나라 민족주의 정당이었는데, 도산계(서북파, 흥사단계)와 이동령계(기호파, 임정계)를 주축으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도산은 강령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에 입각한 한국독립당의 강령을 주도했다. 후일 그가 국내로 압송된 후 한국독립당에 모였던 인물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지만, 임정을 비롯한 모든 민족주의 단체들은 도산의 뜻이 반영된 강령만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오래 기다리던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추진하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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